2009/04/12 22:25

Executive MBA 를 하면서..


작년 하반기에 작정했던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MBA를 공부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만 여처저차해서 원서를 넣어버린 것이었다.
다행히 합격을 하긴 했는데..

다들 쟁쟁한 분들이 들어오셔서 나름 자극도 되고, 처음 몇주는 재미가 있기는 했으나..

주말반이라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한주에 12시간을 강의를 받으려니..체력이 심히 고갈된다.
2년 정식 석사학위 과정인데, 졸업할때 까지 배워야할 과목수가 무려 22개..그리고, 학점 3.0이 안되면 졸업장이 없다는 충격적이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주위에 MBA하시는 분을 보니 쉽게 따더만..
학교를 잘못 선택했다...후회해도 뭐 별수 없지만.

특히, 5주째 부터는 광교의 융합연구원에서 강의를 하는 바람에 집에 오면 토요일 9시..10시..
금요일은 학교에사 마련해준 연구원 기숙사..에서 본의아니게 외박도 하고..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은데, 설상가상으로 매주 퀴즈, 시험, 리포트, 발표가 쏟아져 나오니,
참으로 정신없다.

어제는 리포트가 두개, 발표가 한개여서 모두 금요일 새벽까지 리포트를 마무리하고 자느라
얼굴들이 다들 꺼칠한 것이 느껴진다.

특히 통계과목은 다시 수학을 공부하면서 하려니, 머리에 쥐가 날 정도이다.

걱정은 이번주...

이 악몽의 통계과목에 Business Case를 리포트로 내야 하고, 더구나 이번주에 퀴즈를 다시 본다니.

그리고, 다음주는 이 통계 기말 시험..그리고..다음주는 회계시험 어게인!

이러다 쓰러지지 않을까 약간 걱정된다.

배운다는 것은 좋은데, 과정이 만만치 않네..어떻게 보면 나만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잘하는 것 같아
속상하기도 하다만, 나이 30이 훌쩍 넘은 나이들이니 다들 처리속도는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위안을 해 본다.

혹시 E-MBA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현재 자신의 업무량을 잘 파악하시고 지원하시길.

한학기 등록금도 1500만원이니 만만치  않음.

휴...웃으면서 첫번째 모듈이 지나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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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30 20:08

업무와 스트레스...

얼마전 호주로 떠난 외국 개발자가 한 말이 기억난다.

자신은 스스로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는 업무를 만드는 인생이라고..

인간은 안정과 평안을 희구함과 동시에 도전과 불확실성에의 도전을 동경한다.

나는 어느쪽인가?

오늘은 맘도 몸도 너무 피곤하여, 그냥 아무런 책임없이 둥둥 바다를 떠다니는 수초와 같이 살고 싶다.

눈을 뜨면 무언가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이 때로는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것....

인간은 누구나 쉽게 비난하지만, 정작 그 비난하는 사람들은 비난 받을 사람들 만큼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나도 오늘 누군가를 비난하고,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었다.

좀 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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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5 23:35

나를 울린 영화1 - 빌리 엘리어트


혹시 오래전 개봉했던 빌리 엘리어트라는 영화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극장에서는 보지 못했고, 개봉 한참이후에 신혼초에 집에서 빌리 엘리어트를 보게 되었다.

이야기의 스토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영국 하류층에서 태어난 빌리가 부모와 주위의 걱정을 물리치고 자기가 하고 싶었던 발레를 하게 된다는 스토리 인데, 이렇게 단순한 스토리 속에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었다.

이 영화는 사정이 생겨 집사람이 먼저 보고, 다음날 내가 보게 되었는데, 영화에서 유명한 장면이 마침 나오고 있었다.

빌리는 아버지 몰래 크리스마스 이브날 교회에서(사실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벌써 7년전 이야기니..) 몰래 무용복을 입고 발레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당혹스럽게..그리고 엄청나게 노여운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아버지의 얼굴을 본 빌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저 멀리서 추던 춤을 멈추지 않고 더욱 열정적으로 진지하게 추면서 아버지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을 꽂꽂이 보면서 춤을 추면서 절대로 멈추지 않으리라는 마치 죽음앞에서 의연한 순교자 같은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 장면에서 빌리의 꿈과 열정에 대한 폭발과 이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옆에 앉아서 같이 보던 집사람이 내 눈에 흐르던 눈물을 보면서 민망해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축축한 절망의 계곡에서 빌리가 찾은 유일한 자신의 꿈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오늘 밤 갑자기 이 빌리가 생각난다.

내 인생도 그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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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2 23:08

나는 왜 교회가기를 멈추었는가?


나는 어느샌가 일요일(주일)마다 교회에 참석하는 나를 발견했다.

초등학교 2학년때다.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으로서 엄마, 아빠를 겨우 구분하던 아주 어린시절부터 교회에 다닌 것이다.

그 당시 머릿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와 같은 엄격한 인상과 죄를 지었을 때 돌아올 무시무시한 벌이 혼동되어 있었던 것 같다.

한주 교회를 빠지면, 아무렇지도 않게 한주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이재나 저재나 벌을 받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다가 무언가 나쁜 일이 생기면 교회를 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곤 했다.

물론 성인이 된 지금도 그런 본능적인 죄와 벌의 관계인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왜 나는 교회를 싫어하게 되었을까?

최근 직장인이 된 몇년전까지 서울에서도 주일에 교회에 너무나 잘 다니고, 착실한 교인이었다.

더구나, 일면 안식도 없었던 서울 교회의 목사님은 친히 대구의 결혼식장까지 오셔서 축사 및 기도를 해 주시지 않았던가?

교회를 결정적으로 싫어하게된 계기를 찾기는 쉽지 않고, 서서히 내 마음속에서 교회가 멀어져갔다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른 것일게다.

물론 교회를 싫어한다고 해서, 나를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공학과 전산학을 공부한 자연과학도로서 진화론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서 왜 교회가 싫어지게 되었는지 설명하겠다.

이천년 서울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의 월급은 70만원이었다.

물론 정식사원 이전에 수습으로서 6개월을 근무할 때 였다.

믿음이 굳건(?)한 자로서 한달로 7만원의 십일조를 꼬박꼬박 했다.

수습을 마치고, 연봉은 1900만원으로 올랐다.

여전히 굳건한 믿음의 사자로서 이십여만원에 가까운 돈은 교회의 십일조로 바쳐졌다.

이십여만원은 나에게 적은 돈은 아니었다. 직업이 없는 부모님의 한달 생활비가 될 수 있는 돈이고, 한달 방세를 낼 수 있는 돈이었고, 적금을 하면, 일년에 수백을 찾을 수 있는 내 피가 속한 돈이다.

그렇게 큰돈은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참으로 나에게는 큰 돈이었다.

회사를 옮겼다.

초기 연봉이 3천만원이 넘었다. 한달에 삼십여만원을 십일조를 해야 했다.

굳건 하다고 믿었던 나의 믿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삼십만원은 내가 매달 어머니께 드리는 생활비에 조금 못미치는 돈이다.

이 십일조를 어머니께 드리면, 두배의 생활비를 드리고, 그나마 조금 더 나은

생활을 하실 수 있을 것라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두배를 드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의 굳건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십일조란 것이 무엇인지 찾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십일조에 대한 지식은 어느정도 풍부했고,

무엇보다고 중학교때 장로님께서 침을 튀기시면서 말씀하시던

"믿음 대로 바치고, 복을 시험하라!" 라는 생각이 언제나 뇌리에 박혀있었다.

인간은 간사하여, 하나님께 낼 돈이 많아지면, 고민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이 십일조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피상적인 장로님과 목사님의 설교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학문적으로 말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십일조로 인해 죄책감을 받지 않기를 원했다.

왜, 교회에 헌금을 하면서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가?

개신교 관련 인터넷과 개신교에서 발간된 모든 책들은 온전한 십일조를 바치라고 했다.

그리고, 말라기의 예와 사도 바울의 십일조를 예를 들면서 빠져나갈 수 없는 십일조의 성을 공고히 쌓았다.

그러나, 나는 의문이 들었다. 다름이 아니고, 어떤 사람이 올려놓은 글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연봉이 2000만원인데 실수령액은 1700만원 정도라고 한다면, 십일조를 매월 1700만원의 12분의 1을 내어야 하는지, 아니면 2000만원의 12분의 1을 내어야 하는지를 질문해 온 것이다.

그에 대한 답은 온전한 십일조로서 2000만원의 12분의 1을 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해 보자.

위의 소득자가 아들에게 매월 20만원의 용돈을 준다고 하자.

그러면 이 아들은 매월 2만원의 십일조를 교회에 바쳐야 하는가?

교회의 논리대로라면, 실제로 교회에 바쳐지는 돈은 1/10이 아니라 1/9, 1/8이 될 수 도 있지 않는가?

더구나 위의 아들의 예는 중고등부에서 예외 없이 교회에서 장려하고, 믿음의 아들이라 칭찬해 주는 사례가 아니던가?

나는 이상했다. 이세상이 완전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곳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양심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상식선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

글 이후에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자료를 찾아본 결과, 적지 않은 양심적인 목회자들이 십일조에 대한 바른 관을 전파하려다 실패한 것을 알았고, 일부는 국내를 떠났다는 사실도 알았다.

나는 슬펐다.

 

비록 십일조에 대한 나의 의문은 믿음이 부족한 나의 이기심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결과는 개신교 교회가 가진 커다란 암덩어리를 발견하고 만 것이다.

 

과연 십일조는 현재에도 유효한가? 이것은 이미 정답이 있다. 유효하지 않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그 순간 이미 과거의 모든 율법(번제를 비롯한 십일조 등등)은 모두 과거의 것이 되었다.

 

그런데, 왜 개신교는 현재에도 이러한 헌금 관례를 계속하기를 원하는 것일까?

아니, 더 궁금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신학과정에서 철저하게 몸을 부딫혔을 신학도, 그리고 목회사분들은 왜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 놓고 이야기 하지 않을까 이다.

 

헌금량이 줄어들까봐?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원래 종교성이 강한데다가, 워낙 기복신앙이 투철한 백의 민족은 십일조 명목이 없어도 현재보다 못할 것은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느낀 배신감은 진실을 제대로 이야기 하지 않는 목회자와 앞으로 하나님의 복을 외치며, 뒤로는 돈을 치부하는 교회에 대한 것들이다.

교인에게는 믿음의 분량대로 십일조와 각종 감사헌금과 특별헌금, 건축헌금을 강요하면서, 정작 교회 자신은 1년 예산에 1.5%를 가난한 자를 위해 쓴다.

 

이게 말이 되는가?

그리고, 왜 교회는 나라에 세금을 내지 않는가?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로 말이다.

 

교회의 1/10을 나라에 세금을 내던가, 그 돈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써라.

그렇다면, 나는 십일조가 아닌 다른 명목으로 나의 가장 가까운 교회에 헌금할 용의가 있다.

 

내가 교회가지 않는 이유는 십일조가 아까운 것도, 헌금이 아까워서도 아니다.

 

몇십년간 다닌 교회로부터 그 이익에 위반되는 그 반대의 의견을 한번도 듣지 못하고, 그 치부를 내 손으로 걷어서 내 눈으로 봐 버린 배신감 때문이다.

 

헌금을 내지 않아도, 교회에서 믿음의 분량대로 직분을 얻고, 헌금을 내지 않아도 목사님의 얼굴을 떳떳이 보고, 돈일 없을 때 가장 먼저 교회에 가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그런 곳이 진정한 교회라고 생각한다.

 내가 틀린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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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0 23:07

10년전 일기를 꺼내어..두번째 이야기 1999년 한해..


99년도는 앞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참으로 다사다난한 한해였다.

특히 내가 이전 회사였던 KTIT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된 이유는 이때에 발생하였었고, 돌이켜보면 참 바보같이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봄날 어느날 사장이 나와 다른 한명을 불러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말인 즉슨 올해 잠시 다른 곳에 파견을 갔다오면 안되겠냐는 것이었다.

파견이라...뭐 그렇게 어렵지 않은 요구사항일 뿐만 아니라, 회사를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젊은 때가 아니었던가?

더구나 그 어려운 관문을 뚫고 들어온 회사라 애정도 각별한 마당에.

그리하여, 당시 회사가 있었던 안암동 고려대 산학관에서 부터 떠나 먼 양재동으로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얼마나 내가 바보같았고 세상을 몰랐다는 것은 이제 부터다.

파견간 회사는 새로 만들어진 신생 기업이었고, 직원도 몇명되지 않는 (상대적으로) 작은 조직이었다.

인터넷 전화번호부를 서비스 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시작한 회사였는데, 처음에는 fifthmedia 라는 이름으로 서비스를 하다가 나중에는 free114.com 으로 바꿔서 서비스를 시작했다.

나는 단지 이곳에 파견된 직원이라고 믿고 열심히 일을 하고 내부 조직을 정비하던 몇개월이 지나서 뭔가 이상한 점이 느껴지는게 아닌가?

다름이 아닌 내 월급과 의료보험증 등의 등록처가 KTIT가 아니라 이 회사였던 것이다.

난 놀란 마음에 이 회사 이사에게 물었더니 상당해 애매한 답변 즉, "파견이지만 임시로 적을 옮긴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뭔가 찜찜했지만..그렇다는데 그렇게 믿을 수 밖에..

나중에 알고 보니 아예 회사의 적이 옮겨졌었다는..참으로 말도 안되고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이 KTIT 사장에게 악감정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이유이고, 참으로 인간적으로 더러운 구석이 있는 조직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 이 회사는 사명을 바꾸어서 카이네스 라는 회사로 여전히 사업을 하고 있는데, 사세가 급격히 기울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며칠전 이 회사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보니 그 사장의 인사말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었다.

.....
모두가 풍요롭고 만족해 하는 일터를 만들어 보자고 시작했던 창업이 벌써 1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회사를 거쳐갔고 앞으로도 만나고 헤어짐이 반복될것 입니다.
그들이 함께해 주었기에 카이네스의 오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안타갑게 생각하는 것은 그동안 함께했던 사람들에게 만족감과 성취감을 맛 보여주지 못하고 다른 길을 가게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

10여년이 지나서 이제 깨달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힘든시기에 희망을 가지고 찾아온 젊은이들을 한낫 자신의 이익과 영달을 위해 일개 도구로 사용한, 그리고, 사유물 처럼 이리저리 뒹굴에 만드는 정도의 도덕성을 가진 인간이 이제서야 느낀건지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말만 벤쳐이지 주식을 같이 공유하고, 위험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공동체의식도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던..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허망한 시기였던 것 같다.

그렇게 양재에서 이렇게 저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시간에 한분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그분은 대학원때 ETRI 데이터베이스 연구센터에서 근무하시던 분이었는데 긴히 만나자는 전화를 하신 것이다.

왜 그럴까? 의문이 들었고, 사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별로 만나고 싶지도 않은 마음 상태였다.

얼마후 만났더니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말인 즉슨, 지금 미국에서 "메모리 데이터베이스" 라는 것이 처음으로 나와서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데, 같이 한번 만들어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데이터베이스라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세상에 나온 생소한 개념의 메모리 dbms라는 것이 참으로 흥미를 끌게 되었다. 물론 투자자도 빵빵(?)하고 몇년간은 개발만 할 수 있을 정도로 기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리크루터(?)라고 알려진 김 모 실장님..(이분은 현재 알티베이스 전무님이다..ㅋㅋㅋ)으로부터 연락이와서 호프집에서 만났다.

당시의 비전은 젊은 날의 내가 혹할 정도록 참으로 우아하고, 장황했다.

일단 2년내로 코스닥에 가고 3년내로 나스닥에 갈 수 있는 그런 회사를 꿈꾸고 있고, 장기적으로 경영 플랜도 확실하니 기술만 투자를 하라고.

그리고, 회사의 지분도 약속을 할테니, 결정을 하라는 것이 아닌가?..

흠...나스닥..나스닥..나스닥...몇주간 고민이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옮긴게 참 잘했다는 생각이지만, 그 당시는 나름 인생을 바치려고 그 험한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회사를 쉽게 나온다는 것이 참...인생을 허망하게 한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나..그러나..미국 출장길에 이런 저런 고민을 한 후에 어차피 인생은 한방(?)이라는 참으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나중에 DBMS..시스템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이 어떠한 것이지 제대로 그 맛을 보았을 때는 이미 늦었었지만...

그해 1999년 12월 1일..옮긴 알티베이스로 첫 출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몇개월뒤 KTIT에 같이 입사한 대부분의 동료들은 다른 회사를 창업하면서 모두 옮기게 된다.

그 친구는 바로 얼마전 결혼한 포인트아이의 상무로 있는 친구고, 결국 그 KTIT는 그렇게 사그러들었다고 한다...

나오기전 KTIT 사장에게 간다고 사직서를 던졌고, 그 사장의 떨리던 손으로 담배를 피운던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통쾌한  느낌 뒤에는  1년을 낭비했다는 허무감이 한 참 동안 내 생활 속에 숨쉬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인터넷 벤쳐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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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23:13

10년전 일기를 꺼내어..첫번째 이야기 1998년 하반기부터 99년 초반

최근 결혼을 하게된 한 친구를 만나면서 10년전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너무나도 빨리 흐른 시간들이라 제대로 기억이 날 지 모르겠지만, 혹여 이러한 글들로 인해 다른 독자들의 앞날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비는 마음에서, 그리고 나름의 기록을 남기는 의미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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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98년 9월 경..

IMF라는 직격탄을 맞은 대한민국은 우울한 중병에 걸려 있었다.

나는 90학번으로 돼지띠, 71년생, 나중에 알고 보니 가장 인구가 많은 해에 태어난 불행아(?)였고, 72년이 2위, 70년이 3위로 인구가 많다고 하니..가히 콩나물 시루 교실에서 공부한 세대가 확실하다.

96년 대학졸업 당시 LG 소프트라는 - 지금은 없어진 - 회사에 경력직(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다음에..)으로 합격한 나는 또다른 계획을 세워 대학원에서 컴퓨터 과학을 공부하기로 맘을 먹고 대학원에 입학했었다. 만일 IMF를 예상했더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을 것이다.

내가 다니던 학교의 컴퓨터과학과 대학원의 DBMS 연구실은 국내에서 말 그대로 DBMS 핵심 소스를 만질 수 있는 몇안되는(ETRI,.등 몇몇군데..) 곳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고, 당시에는 지도 교수님의 권유로 이 연구실에 입학을 하게 되었었다.

4학기째였던 된 당시 98년은 국가 부도사태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지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가 도처에 혼재하던 상황이었고, 한편, 21세기를 얼마두지 않은 일종의 기대감도 어느정도 있었던...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시기였던 것 같다.

IMF로 인한 취업에 대한 약간의 불안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날 한통의 채용공고를 인터넷에서 보게 되었다.
한국통신에서 새로운 벤쳐를 만드는데 필요한 인재(?)를 채용할 예정이고, 최고의 대우를 약속한다는 한장의 홈페이지였고, 당시 KT라는 말에 홀려..(IMF시기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나도 모르게 입사지원을 하고 말았다. 아마 9월초.. 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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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한가지 기억나는 에피소드 한가지.

당시 입사지원을 하기 위해서는 영어로 자기 소개서를 작성하고, 장래의 포부를 적으라는 요구사항이 있었다.

근데, 영어로 자기소개서를 써 본 적도 없거니와, 제대로 썼는지 검증해볼 방법도 없었던 당시에 1개월째 다니고 있던 삼육 영어 학원의 선생님이 기억이 났다.

급한 마음에 그 선생을 찾아가(남아프리카에서온 흑인 아저씨였는데) 사정이 이러저러 하니 좀 도와달라고 했다.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시간이 너무 없으니 미안하지만 안된다고 하는 냉정한 거절에 상처(?)를 받아 뒤돌아섰다. 나중에 딴소리 하시더만...-_-;;

근데, 계단을 내려오는 중에 2층 강당에 나이많은 흑인 외국인이 있는게 아닌가? 나는 체면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다시 주저리 주저리 사정을 했다. 역시 이 분 역시 바빠서 도와줄 수 없다는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 실망한 나머지 다시 연구실에 돌아오던 중에 그 건물 꼭대기에 어학당이 있는 것이 다시 생각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그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는데..어쨌든 다시 당당하게 그 어학당으로 걸어들어가(사실 본인은 낯도 많이 가리고 내성적인...-_-;;) 무조건 외국인을 찾았다.

아..마침 중년의 백인 아주머니가 지나가는게 아닌가? 그래서 다시 붙잡고 안되는 영어로 설명을 하니 흔쾌히 자신이 도와주겠다는 것이다.."유레카!"

그래서, 만들었던 자기소개서를 보여주고 다음날 자신이 손수 수정해 그것을 이용해서 자기소개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것은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이다.

재미 없는 이야기지만.. 언뜻 당시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내 모습이 스쳐지나가는 듯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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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후 면접 통지가 왔다...아..큰일이다.

내심 박사과정을 은근히 강요(?)하시던 교수님이 아시면 노발대발 하실 것 같았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상경하여 면접하러 갔다.

면접 장소는 양재동 KT연구개발센터..

희망에 부풀고..또한 벤쳐라는 단어에 가슴 한가득 희망을 담고 면접을 보게 되었다.
 
당시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데, 면접을 보러온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이야기만 듣고 다시 내려갔었다. 업종은 생소한 GIS관련 비지니스라고 하는데, 뭔가 DBMS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연봉도 꽤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섞인 기대도 하면서..

며칠후 면접에서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취직이라는 상황에 콩깍지가 씌의게 되었다.
다음날 얼굴빛이 하얗게 변해 담배만 뻐금뻐금 물고 계시는 교수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빨리 상경해야 하니 미리 연구실을 나올 수 있도록 부탁을 드리고 나니 세상을 모두다 얻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 뜻을 세상에 펼치는구나...

만일 내가 6개월만 앞을 내다볼 수 있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결정이라는 것은 멀지않아 깨닿게 되었고, 세상이 참으로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나중에 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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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연구실에서 내가 하고 있던 프로젝트는 ETRI에서 개발했던 국산 DBMS인 바다 3의 쓰레드화 작업이었다.

당신 바다는 멀티 프로세스 구조였는데, 90년대 중후반에 오면서 멀티쓰레드 기술이 점점더 운영체제 기반으로 제공되는 시기였고, 일종의 트랜드처럼 번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특히나, 이전 바다-2를 멀티쓰레드화 했던 역사가 있었던 연구실이라 이 프로젝트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이런 멀티쓰레드, 멀티 프로세스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여기에서 그만하기로 하고, 어쨌든 이 프로젝트는 죄없는 1학년 후배가 마무리를 하게 되었다.  (나중에 이 후배는 알티베이스에 입사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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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당시에 집안 상황이 너무 안좋았던 나는 당장 서울에 상경을 해서  집을 얻을 형편이 아니었다. 월세를 알아봐도 최소한 500만원의 보증금을 내야했었다.

상경할 때 어머니께서 이모에게 빌린 100만원을 손에 쥐어주시며 나중에 보내고 나서 미안해서 울었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어쨌든 KTIT 이사님과 함께 같은 방을 쓰게 되었고, 양재동 오피스텔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꿈과 희망으로 가득찼던 그 처음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연구소 구석 작은 방 하나에서 내 자리가 있고, 열심히 일을 하면 언젠가는 나도 다른 벤쳐 성공스토리처럼 부자가 되겠지...만 27나이의 젊은 청년은 그렇게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회사를 가니, 삼성 SDS에서 이직한 친구가 한명있었고, 무슨 토목기사 출신의 친구가 또 한명 있었다. 또한 프리랜서로 같이 업무를 하고 계신 분도 있었고...GIS 관련 업종이라 그런것이려니 했었다.

며칠지나 다시 한 친구가 입사하게 되었는데, 이 글을 처음에 밝힌 것 처럼 곧 결혼하는 나와 동갑의 돼지띠 친구이자, 안동이 고향인 김원태라는 사람이다.  지금 이는 포인트아이의 상무로 근무하고 있는데, 나보다 훨씬 높은 곳에 사시는 분이라...나는 일개 실장이라...얼굴도 뵙기 힘들다...^^

이 친구와 왠지 죽이 잘 맞아서 밥 먹을때나 힘들때 서로 많은 위안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 KTIT 즉, 한국통신 정보기술에서 준비하고 있던 서비스는 인터넷 지도 서비스였다. 당시에는 인터넷 초창기를 좀 벗어난 상태에다가 인터넷에서 서비스되는 웹지도가 그렇게 높은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었다. 그리고, KT에서 지난 수십년간 축척한 지도데이타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서비스로 전환하는 것이 회사의 첫번째 목표가 되었었고, 두번째는 인터넷 전화번호 즉, yellow page 서비스가 또 다른 비지니스 모델이었었다.

입사하고도 실제로 서비스가 제대로 동작하도록 하기 위해 넘어야할 많은 난제들이 있었고, 결국 그해 말에 성공적으로 한국 야후에 지도서비스를 납품함으로써 하나의 큰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브랜드 네임은 "프리맵" 이라는 이름으로 서비스를 오픈하였고, 당시 www.freemap.net 이라는 URL로 접속할 수 있었고, 얼마 있지 않아 국내 10여개의 대형 포털을 비롯한 인터넷 사이트에 둥지를 트게 되는 나름의 성공을 이루는 듯 했다.

당시 1999년도 초반은   인터넷 광풍이 시작되던 때였고, 여기저기에서 천사의 합창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우리 초창기 직원들은 처음에는 수습으로 근무를 시작했는데, 그 수습기간이 무려 6개월이나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아직 사회를 모르는 우리로서는 어느정도 수긍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좀 억울하게 생각하면서 월 70만원 정도..그것도 세금때면 더 적은 액수의 돈을 받으면서 모든 에너지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쏟아붓고 있었는데, 정직원으로서의 변화가 남은 시점이었다.

내심 기대도 하고 있었고, "최고의 대우!"라는 말도 머릿속에 각인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상당히 높은 연봉을 기댜리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당시 입사할 때 경쟁률이 공식적으로 150;1이 넘었다고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나름의 자부심도 가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근데..근데...똥누러갈 때와 나올때가 다르다고 하더니..실제 연봉은 1600을 준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있던 친구들은 나름대로 한칼(?)하는 사람들이었고, 경력자도 상당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통보를 받고서는 모두들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벤쳐는 서로의 리스크를 공유하고, 그 결과인 과실을 함께 나누는 것이 그 모토일 텐데, 주식 1주도 준다는 소식도 없거니와 스탁옵션에 대한 이야기도 일언반구 없는 것이었다.

뭔가 이상하고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사회초년병이 이것저것 가릴 정도로 영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에 이천만원도 되지 않는 연봉으로 결론을 내고 말았다.(지금같으면 국물도 없겠지만....)

그리하여 정식 직원으로서의 직장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얼마되지 않아 모두들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참으로 어이없는 결말이 그해 말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가지 98년에서 99 초반에 일어난 것들인데 이 글을 쓰기 위해 기억을 더듬는 그 순간순간이 매우 또렷하게 남아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아마도 쌩쌩한 20대 후반의 두뇌에 당시의 모든 기억들이 속속들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결과적으로 참 우울한 시기였는데, 당신에는 참 즐겁고 재미있었던 것을 보면, 젊음이라는 것이 참 요상스럽기도 하다.

기회가 되면 알티베이스로 오게된 뒷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내가 다시 읽어봐도 별 재미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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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20:45

해외 개발자 채용하기 - 두번째

1년만에......이전에 이어서 계속하도록 하겠다.

처음으로 러시아 브라디보스톡에 거주하는 한 개발자 B를 최종적으로 채용하기로 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상당히 호의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를 알고 보니 부인이 한국에서 얼마간 거주한 경험이 있었고, 한국으로 꼭 다시 오고 싶어하는 이유였다.

문제는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는데, 사내에서 최근에 해외 개발자를 채용한 적도 없고, 예전에 A를 채용할 경우에는 이런 일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에이전트를 통해서 였다.

결론적으로 그 에이전트가 하던 일을 모두 회사내에서 직접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다가왔다.

그러니, 영문으로된 계약서가 있을리 만무하고, 또한, 복리후생 정책에 대해서 영문자료로 있을리도 만무했다.

또한,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유럽에서는 이러한 계약서 작성이 무지무지하게 중요하다는 것을 그 때 비로소 깨달았다. 사실 본인은 매년 연봉협상 후에도 계약서를 꼬박꼬박 작성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이채로왔다고나 할까?

다행히 부인이 한국어를 읽을 줄 알기 때문에 계약서는 영문, 관련 복리후생, 취업규칙은 한글로 보내주는 해결책을 찾았다.

달랑  1페이지짜리 계약서를 보냈으니, 뒷일은 어지간히 짐작될 것이다.

계약서의 시작일자를 업무시작일로 고쳐달라..(언제 올지로 모르는데?), 얻어줄 집에 대한 예산을 명시해달라(잉?),  기억으로 약 8회정도 계약서가 오가고, 힘겨운 사인을 받았다.

나중에 A에게 들은 이야기는 러시아내 한국회사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2000년 초반 인터넷 붐이 일었을 때, 대거 한국에 왔다가 제대로 대접도 못받고, 혹은 계약서와 다른 업무, 교육도 없고, 비상식적인 해고 등등..온갖 추악한 소문이 러시아에 퍼져있기 때문에 확실하게 일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계약서가 완성되었다고 바로 초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본격적인 업무가 남아있었다.

우선  현재 대한민국에 있는 중소기업에서 외국 IT인력을 채용할 경우에는 IT 벤쳐기업연합회에서 발급하는 IT카드를 발급받아야 한다.

이 카드가 있어야 국내 취업비자인 E-7(http://www.hikorea.go.kr/pt/kr/info/popup/icis/e_7_pop.html) 비자가 발급되는데, 발급기준은 완화되고 있는 추세로 보인다.

그 당시 기준은 석사 졸업기준으로 2년이상의 경력이 있을 경우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를 들었으나, 오늘 홈페이지(www.itcard.or.kr)에 접속해 보니 학사이상 학력의 경력 1년 이상으로 대폭 준 것으로 보인다. (2007년 10월 보다 어쨌든 완화된 것임)

그런데, 이것을 발급 받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서류

피추천 해외인력 관련 서류
 
이력서(근무업체별 근무기간이 반드시 월단위까지 명시)
반드시 영문 또는 국문 번역본 포함.
졸업증명서 혹은 학위증 사본
반드시 영문 또는 국문 번역본 포함.
경력증명서
반드시 영문 또는 국문 번역본 포함.
고용계약서(고용계약기간이 반드시 월,일단위까지 명시)
정보통신 관련 자격증 사본(선택사항)
여권사본
를 준비해야 하고 골치아픈 것은 영문 번역본이 있다 하더라도 국내에서 다시 한번 공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위의 것은 해당 개발자가 준비하는 것이고 회사에서는 또다른 서류를 준비해야 한다.

또한, 채용주체인 본인의 경우에는 2종류의 문서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데,

    초청사유서 및 인력활용계획서(소정양식)

이라고 하는 문서를 다시 만들어서 같이 제출해야 한다.

사실 계획서라는 것이 유동성이 있는 것인데, 미리 십몇개월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좀 현실과 동떨이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으나, 어쩌랴..달라는데..

그리고, 한가지 러시아의 특이한 회사 문화중 한개는 WorkBook이라는 작은 책처럼 생긴 서류를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뭐냐고 사내 러시아 개발자에게 물어보니, 예전 공산주의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인데 해당 근로자의 경력 히스토리와 같은 것인데, 모든 회사에서 해당 책자를 확인한다는 것이다.

만일 예전에 안좋은 일이 생겨 이 문서에 빨간 줄(?)이라도 가면, 더이상 취직이 불가능 하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도 해 주었으나 별로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다. 정말 그런지 경험해 보지 못한 처지로서는...


이렇게 IT 카드 발급을 기다리다 보면 2~3주 걸리는데, 큰 문제가 없으면 발급된다.

그렇게 엄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는데 이것은 가능하면 중소벤쳐의 인력난을 덜기 위한 혜택의 일환으로 도움을 주려는 것으로 보였다..현재까지 5명의 외국인 개발자를 채용했는데, IT 카드 발급에서 문제가 생긴 것은 한번도 없었다.

이 카드가 발급되면 다음단계..비자를 신청해야 한다.

당시 비자가 발급되기까지는 약 2개월 정도 걸렸는데 (최근에는 좀 더 빨라진 것 같다) 상당히 재미있는 사실은 E-7비자는 중국국적인에게는 발급되기가 매우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경우에는 큰 문제없이 발급되었던 것 같은데, 사내 중국 국적의 근로자에게는 당시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해당 사무소에서 통보를 받았었다고 한다.

해서 사장님께서 직접 몇몇 문서에서 도장을 찍고 서야 비로소 받았다는 뒷 이야기도 있었다. 이런 말을 듣고 보니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한국인"이라는 장점(?)이 잠깐 느껴지기도 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이후 비자가 발급되면 비자 번호가 나오는데, 이 번호를 가지고 해당 외국인 개발자가 근처 한국 대사관에 방문하여 한국비자를 발급 받으면 된다.

휴........

최초 외국인 개발자의 경우(2002년) 외주 업체를 통해 뽑아 큰 어려움을 몰랐었는데, 이렇게 직접 진행해 보니 처음에는 상당히 죄충우돌이 많았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초 한번 시행을 겪고 나면 이후부터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2008년 벌써 11월인데, 본인이 담당하는 개발실에 외국인 개발자가 벌써 5명, 다음주 도착하는 한명이 더 오면 6명이 된다.

여러가지 많은 회사내 이야기들과 감당해야할 어려움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전체적으로 볼 때 채용된 개발자들의 능력과 결과를 놓고 보면 꽤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다음에는 실제 이러한 개발자들의 생활과 문화적 차이..느낀점들에 대해서 적어보고자 한다.

외국인 개발자는 채용하고자 하는 회사에 작으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간절히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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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1 22:57

해외 개발자 채용하기 - 첫번째

올해 초 새로운 개발 파트로 분리되고, 내가 그 파트를 맡게 된 이후부터 큰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재능있는 개발자의 채용이다.
재능이 있다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개발 파트의 장으로서 좋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은 사실상 절대절명의 과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높은 기술적 수준과 의사소통 능력, 그리고 나름의 이상을 품은 개발자를 얻는 것은 반드시 이뤄야할 과제임이 틀림없다.

허나, 본인의 기억으로 2006년 부터 연구개발본부의 개발팀장으로 있으면서 수십명의 개발자를 면접하고, 채용을 하였으나, 사실 썩 맘에 드는 개발자는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그런 정도의 개발자가 알티베이스에 지원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바른 표현인 것 같다.

특히, 최근에는 전산쪽이 인기도 없거니와, 괜찮은 정도의 실력이면 프리랜서를 통해서 더 많은 돈을 빠른 시간내에 벌 수 있다는 풍문도 있는 걸 보면, 알티베이스라는 회사에서 고만고만한 개발자로 있는 것이 나쁜 선택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하여, 눈을 돌린 것은 외국이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동유럽이나 베트남과 같은 신흥 공업국이면서 상대적으로 교육수준이 높은 나라를 찾은 것이다.

이렇게 한 또 하나의 이유는 알티베이스 내에 그 당시 유일하게 우크라이나 출신의 개발자 A가 5년간 근무하고 있었고, 개인적으로 그 능력에 때때로 감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채용을 위해서는 만만치 않은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는 것을 서서히 실감하기 시작했다.

우선, 팀내 개발자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말도 잘 안통하고, 보기에 썩 잘하는 것 같지도 않은 개발자를 왜 뽑으려고 할까? 뭐, 이런 시선이 첫번째.

둘째는 언어문제였다.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다행히 기존의 우크라이나 개발자는 영어로 의사표현이 어느정도 가능한 수준이고, 나 또한 서바이벌 잉글리쉬에 어느정도 통한 지라 영어로 면접을 봐야 했다.

세번째는 주택문제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외국 개발자를 뽑으면 집을 대신 빌려주는데, 이는 규모가 작은 벤쳐나 기업 입장에서는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네째, 임원진들의 외국인 개발자에 대한 채용 의지 및 회사 문화이다. 다행히 우리 회사는 경험이 한번 있었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 않게 이 부분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제 면접을 볼 차례.

A와 함께 질문지를 만들었다. 프로그래밍 언어, 운영체제, 하드웨어, 알고리즘, 트릭 몇가지 등의 약 40여 항목의 질문 리스트를 만들고, 이를 면접시에 활용했다.

외국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람과의 인터뷰이기 때문에 skype를 통해서 인터뷰를 할 수 밖에 없어서 얼굴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웠고, 우크라이나와 같이 인터넷 환경이 좋지 않은 곳에서는 음성 마저도 때때로 끊어지곤 했다.

몇몇 개발자에 대한 인터뷰를 본 결과 5명에 1명꼴로 괜찮은 개발자가 있었고, 이는 국내 개발자와 비교해 볼 때 약간 확률이 높은 정도라고 볼 수 있었다.

영어로 면접을 보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부분도 있었으나, 대부분 해외 개발자들이 자신의 의사를 무리없이 영어로 표현하는 것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물론 최근에 국내 개발자들의 영어 실력도 무시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정도는 아닐 것 같았고, 내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하는 계기도 된 것 같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다...

다음의 글을 통해 실제 비자를 얻고, 입국까지의 경과를 올리도록 하겠다.

해외 인력채용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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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4 14:08

알티베이스의 직원 모집과 근무 환경

회사 설립후 처음으로 직원모집을 신문을 통해 광고를 낸 결과

예전과는 다르게 많은 개발자들이 회사에 지원을 하였다.

이전까지는 수시모집 형태를 띠고 있었고,

이에 따라 가물에 콩나듯이 한두명씩 채용을 하던 때와는 달리

하루에 두세번 정도 면접을 봐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렇게 약 한달가량 면접을 보면서 느낀 것들에 대해

KLDP renewal을 기념하면서 손가는 대로 적으려고 한다.

우선 이 글쓴이에 대한 배경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글쓴이의 글 내용이 정말 이 회사의 정책이나 비젼,

그리고, 깊숙한 곳에 숨겨진 이야기까지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신뢰를 주어야 이 글이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99년말 메인 메모리 DBMS가 무엇인지 알려지지도 않은 때에

우연치 않게 이 회사설립 창립멤버로 참가하게 되었다.

대학원때 ETRI의 바다 프로젝트를 몇번 하였는데, 그때 눈여겨 보신

한 연구원께서 새로운 회사 창립에 참여하자는 권유를 하셨고,

마침 그때는 인터넷 광풍이 불고 있던 때가 아닌던가?

그 이후로 알티베이스 1 개발을 함께 진행하였고,

알티베이스 2를 새로 개발하는데 팀장으로서 엄청난 고생을 했다.

그리고 최근 Hybrid DBMS라고 불리는 알티베이스 4의 개발 팀장으로

2년정도 죽을 고생을 한 프로필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약 6년간 알티베이스에서 근무를 하면서, 6명의 회사의

설립초기부터 지금 약 70여명까지 오면서 겪은 모든 일들을

아마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대충 이정도로 글쓴이의 소개를 마친다.

알티베이스의 채용은 자체 채용 시스템을 통해 영업, 기술지원, R&D 로

분류되어 지원된다.

이 글에서는 R&D 즉, 연구개발부서에 한정된 것임을 알린다.

누군가가 채용 시스템을 통해 마음에 드는 지원자를 채택하게 되면,

일단 1차 서류 전형은 통과한 것이다.

일단은 DBMS의 개발 경험이 있다면 금상첨화이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국내에서 DBMS를 개발한 경험을 가진 이가 얼마나 될까?)

또한, 학벌이나 성별, 나이를 크게 따지지 않는 것이 기본 정책이고,

개인적으로는 무언가 다른사람과 다른 독특한 사람을 선호한다.

이렇게 통과한 분은 별도의 연락을 통해 개발실 팀장, 본부장 5명과 함께

면접을 하게 된다.

흔히 면접이라고 하면, 예전에 무엇을 했는지, 가족은 어떻게 되는지,

지원 동기는 무엇인지 등 기술과는 크게 관계없는 것을 묻고는

끝난다.

그러나, 연구개발실 면접에서는 조금 다르다.

위의 내용도 물론 물어보지만, 실제로 그 사람의 이력서에 대한

내용대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지식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기술적으로 질문을 한다.

예를 들면, N 노드를 가진 B+Tree의 평균 검색 Cost는 얼마인가?

혹은 운영체제에서 MMU를 설명하라..등등의 질문이다.

혹은 통계/확률이나 Software Engineering 에 대해서도 심층적으로

질문을 한다. (질문은 개인 이력서에 기반한다)

이런 질문을 하게 되면, 면접자 열이면 열 모두 매우 당황한다.

왜냐하면, 한번도 이런 면접을 가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고,

자신이 가진 기술적 내용과 지식을 적나라하게 남에게 설명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멋잇는 답을 하는 사람의 경우는 문제의 답을 외워서가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직접 보여준 사람이었다. (같은 개발자로서

대단히 멋있었다)

이러한 면접 스타일은 서구에서 보편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라는 곳에서는 생소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MS나 구글같은 대단히 좋은 환경을 제시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질문까지 하면서 면접을 하는가" 에 대한 고민스러움도 있다.

그러나, 조직의 크기와는 무관하게 우리가 원하는 사람을 뽑기 위한

과정은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을 것이고, 이것이 알티베이스에서

원하는 채용의 형태이다.

이러한 면접은 약 40~60분간 이루어지고, 면접은 마치게 된다.

이후에 팀장 및 본부장의 회의를 통회 만장일치제를 통해

채용 여부를 결정한다. 만일 한명의 팀장이라도 거부를 하게 되면,

애석하게도 그 사람은 탈락이다. 이렇게 만장일치제를 도입한 것은

혹시라도 채용한 이후에 발생하게될 불미한 상황을 미리 방지하고,

모두가 원하는 인재를 얻기 위한 것이다.

면접에 합격한 사람은 2차로 CEO와의 면접을 통해(대부분 합격이다)

연봉과 출근 일자가 결정된다.

그리고, 한가지 아쉬운 것은 면접하러 오신 분들의 대부분이

알티베이스에서 근무하는 개발자들의 근무환경이나 복지정책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목적도 바로 그러한 것들을 알리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후에 하나씩 알티베이스라는 회사가 가진 개발자를 위한 근무환경,

장점 등을 설명하도록 하겠다.

개인적으로 볼 때 한국에서 비록 작은 벤쳐이긴 하지만,

알티베이스 만큼 역량있고, 개발자의 천국이라고 부를 만큼의 환경을

갖춘 회사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인 역시 인맥이 넓지 않아, 더 좋은 회사가 어딘가에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첫번째, 회사의 매출구조가 개발인력의 집중을 높인다.

이것이 아마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 같다.

알티베이스는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도 시스템 소프트웨어 분야라고

불리는 DBMS이고, 또한 패키지 소프트웨어이다.

알티베이스의 매출은 100% 이 패키지 소프트웨어의 판매와

이전에 판매된 제품의 유지/보수료로 이루어진다.

이 의미는 제품을 판매할 때 라이센스를 판매함으로써 일단의 판매행위가

끝나기 때문에, 별도의 customization이나, 개발인력이 고객에 의존되어

엮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보인 주위의 개발자를 만나 이야기를 해 보면, 대부분의 매출구조가

패키지를 판매하되, 그 패키지를 고객의 입맛에 맞게 수정하고, 이를 위해

SI 형태의 파견근무를 하고 있었다.

열악한 근무 조건과 들쑥날쑥한 출/퇴근 시간, 혹은 밤새기,

그리고 고객사로부터의 직접적인 요구사항,

이에 따른 스트레스는 사실 IT 업계에 꿈을 품고 들어온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알티베이스의 개발자는 자신이 만든 모듈의 제품이

완벽하고, 충분히 잘 돌아간다면, 말 그대로 Well-Being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다.

둘째, 자유로운 개발환경이다.

이 자유는 본인 스스로도 매우 갈구하고, 갈망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9:00 출근 6:00 퇴근이라는 고정된 시간은 많은

스트레스를 준다.

다행히, 알티베이스는 고정된 출퇴근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출근 안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무슨 급한 일이 있으면

10:30까지 출근해도 이해가 된다는 것이고, 집에 사정이 있으면,

5:00 시에도 팀장에게 알리면 대부분의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허락된다.

주5일 근무에 휴가는 1년에 10일 부여되고, 1년 근무연한이 늘 때마다,

1일씩 늘어난다.

여기 휴가에서도 자유가 포함된다.

모든 회사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자신이 쉬고 싶은 날에는

언제나 요청만 하면, 즉시 쉴 수 있다.

심지어 오전에 일이 생겨서 팀장에게 연락을 하면, 그날 하루를 휴가를

쓰면 된다.

사람의 심리란 오묘하고, 신비해서, 자유롭게 쉴수 있다는 자유를

가지게 되면 삶이 풍요하고, 편안하게 생각이되고,

휴가를 쓰기 위해 윗사람 눈치를 보게 된다고 생각하면,

그만큼 큰 스트레스는 또 없다.

가정을 가진 가장의 경우에는 특히 아기가 아프거나,

와이프가 아파서 애기를 봐야 하거나, 혹은 집에 경조사가 있는 경우

회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게 얼마나 행복한가?

만일 알티베이스가 이렇지 않다면, 본인 역시 연봉이 높은 다른 회사를

기웃기웃 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몇년전 국가 연구소에 채용이 되어 전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이러한 자유로운 삶 때문에 포기한 경험이

있다. 그 연구소는 휴가를 1년에 3일을 주는데 모든 직원이 함께

쉬어야 한다는 상상도 못할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접게 되었다.

이러한 철학의 뒷면에는 "지식 노동을 하는 개발자는 1시간당 생산성이

중요한 제조업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라는 것이 깔려 있으며,

이 사상은 본인도 100% 공감하는 부분이다.

단언컨데, 알티베이스가 위의 자유로움을 포기한다면, 본인도

기꺼이 이 회사를 포기할 것이다.

그만큼 심리적 자유는 개발자에게 중요하다.

셋째, 수평화된 조직구조이다.

직급상으로는 개발실이 본부장, 팀장, 팀원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실상 들여다 보면, 팀장이나 본부장이 팀원에게 군림한다거나,

부서의 장으로서 더 혜택을 받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개인의 업무만 더 늘어나는 형국이다. 물론 팀원을 충원하거나,

팀장 회의에 참석하는 외형적인 활동이 있긴 하지만,

그게 더 높은 지위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본인도 팀장이긴 하지만, 팀원 관리하고, 체크하는게 부담이고,

그냥 설계하고 코딩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

나이때문에 팀장을 시킨것 같기도 하고....

최근에는 팀원과 본부장간의 언쟁도 있을 정도이니 상하관계를

중시했던 전통적 회사 구조하고는 조금 다른다고 생각된다.

넷째, 엄격하고 공정한 성과관리 시스템이다.

알티베이스는 연말에 개인의 성과를 평가받는데, 이는 가장 엄격하고,

공정하게 진행된다.

물론 피평가자는 불만이 있을 수 있지만, 팀장이 모여서 팀원의

평가에 쏟는 노력과 시간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렇게 공정해야 하는 이유는 조직내에서 능력있고, 업무를 잘

진행하는 사람은 그만큼의 대우를 받아야 충성도도 올라가고,

회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아직 작은 회사기 때문에 부족한 면이 있지만, 엄격한 성과관리라는

대전제를 완수하기 위해서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있다.

다섯째, 효율적인 업무 시스템이다.

알티베이스의 초기부터 지금까지 겪어온 시행착오가 알티베이스

개발 업무 시스템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남이 A라고 말해서 A를 하는 것과 죽을 고생을 해서 A라는 것을 알고,

A를 수행하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다.

말그래도 체화, 영어로는 institutialization(대충..) 과정을

거친 업무 시스템이기 때문에 아마도 국내에서는 내노라 할 정도의

수준이라고 감히 자부한다.

이 시스템이라는 의미는 단순히 인트라넷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소스코드 한줄을 고치기 위해서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버그가 없을까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6년간 해온 결과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모듈에 버그가 발생했다고 가정하면,

1. 누군가 Bug를 리포팅하면, Bug System에 등록된다.

2. 이 BUG는 일련번호가 부여되고, 자동적으로 담당자에게 시스템을 통해

알려진다.

3. 이 버그의 시급성에 따라 우선순위가 결정되고, 재현케이스를 찾는다.

4. 이 재현케이스를 찾아서, 원인을 파악하면 그 내용을 버그 시스템에

등록하고, 이 내용을 다른 팀원과 리뷰를 수행한다.

5. 버그를 수정하면, 수정된 소스코드의 내용과 이 버그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regression test 시스템에 테스트 코드를 등록한다.

6. regression test를 모두 수행하고, 변경된 코드가 다른 동작에

영향이 없는지 검증한다.

7. 영향이 없다고 검증되면, 동일한 업무를 맡은 동료와

수정된 소스코드, 수정된 테스트 코드를 리뷰하고,

8. 최종적으로 오전에 모든 소스를 commit 한다.

앞으로 이러한 프로세스가 더 개선될 여지가 있지만, 현재 수행되고 있는

버그 관리 시스템이다.

이것은 가장 간단한 예를 나타낸 것이고, QA 조직을 통해

현재 소스코드의 warning 상태, cyclomatic number 검증,

regression 테스트가 모든 포트에 대해 동작하는지,

제품 릴리즈에 따른 엄격한 테스트 등등..

지금까지 알티베이스가 쌓아온 개발 시스템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지식이라고 감히 자부할 수 있다.

알티베이스에 근무한다면, 이러한 귀중한 자산을 배울 수 있고,

다른 조직에 옮기더라도 평생지식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여섯째, 대규모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 있는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곳이다.

현재 알티베이스의 소스코드는 약 200만 라인 정도인데, 예측 컨데

1~2년 내에 500만 라인을 넘길 것으로 생각된다.

테스팅 코드를 포함하면 몇년내 1000만 라인이 넘어갈 것이라고 예측된다.

국내에서 이러한 대규모 시스템을 개발하고, 유지/보수 할 수 있는

경험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어떻게 얻을까? 생각해 보면,

개인의 경력관리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실제로 혼자 몇만 라인을 개발하는 것하고, 30여명의 개발자들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대규모 시스템을 개발하고, 협업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일곱째, 사원 복지 정책이다.

물론 대기업보다 더 낫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벤쳐기업이 가질 수 있는

특화된 복지 정책은 자랑할 만 하다.

우선 개인 회식비가 1개월에 10만원이 팀에게 지급된다.

술을 엄청 마시는 경우를 제외하면, 사실 한사람이 10만월을 모두

회식해서 쓰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예전에 우리팀은 이 돈을 아껴서 제주도로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고, 올해는 금강산에 다녀올 계획이다.

물론 회식비와는 별도로 개인 워크샵 비용이

(1년 24만원..? 정확하지 않지만) 지급된다.

또한, 연봉과는 별도로 1년에 240만원 한도내에서 개인 체력단련비가

50% 지원된다.

명목은 체력단련비지만, 올해부터 항목이 대폭 완화되어서,

취미활동, 병원, 여행 등의 비용을 무조건 50% 회사에서 제공한다.

개인적으로 책을 살 기회가 많은데 너무나 행복하다.

최근에는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1질을 구입했다. ^^

마지막으로 휴식 refersh 제도를 들 수 있다.

이는 회사에 5년 근무한 사람은 1년동안 주 1일을 공부나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혹은 3개월 동안 유급 휴직을

보장해 준다.

벌써 이 제도를 사용하고 있는 직원도 있고, 이러한 유사한 제도가

있는 회사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생각해 보라.

3개월 동안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오는 것들을....

오해 말 것은, 위의 것들이 특별한 것들이고, 일반 경조사와 같은

다른 회사에서 제공하는 평이한 것들은 당연히 지급된다.

또한, 개발실에는 탕비실이 있는 그곳에는 컵라면과 햇반,

과자 몇박스, 음료수 수십개, 그리고 공짜인 커피 자판기 등이 있다.

배고프면 라면을 먹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과자로 배채우는 직원도 있다.

살벌하게 커피만 달랑있는 회사와는 차원이 다른 배려이다.

궁금하시면 직접 방문하면 보여줄 용의가 있다.

그리고, 회사내 cafe가 있는데 그곳에는 PS2 2대가 있어서

머리 아플때는 버퍼4나 위닝11을 하면서 휴식을 가질 수 있다.

또 한가지, 팀장의 재량이 크기 때문에 각 팀의 독특한 제도를 만들 수

있는 *자유*도 자랑할 만 하다.

이것은 아직까지 우리 팀에만 있는 제도인데, 예전에 존재했다가 회사가

바빠지니 없어진 제도이기도 하다.

일명 혁신시간 이라는 제도인데 1주일에 4시간을 원하는 주제를 선정해서

공부하고, 발표하는 것이다.

회사에서 별도의 시간을 명시하지 않으면, 개인이 연구할 시간이 없거니와,

그러한 시간을 통해 알티베이스가 한단계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삼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바라기는, 알티베이스가 미국 제록스의 팔로 알토처럼

열정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 세상에 유익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개발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해서, 알티베이스가 모든 개발자들이 일하기 원하는 조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사족을 달자면, 알티베이스는 지속적으로 혁신을 해온 회사이다.

99년에 국내 최초로 MMDBMS라는 시장을 열고 개척하였고,(version 1)

2001년에 세계 최초로 MVCC기반의 레코드 레벨 라킹을 지원하는

MMDBS를 개발하였다.(version 2)

2003년에는 세계 최초로 TPC-H라는 대규모 Query Set을 지원하는

MMDBMS로서 또한번 신기원을 열었고(version 3),

2005년에는 Hybrid DBMS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고,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version 4)

이 회사에서 같이 행복하게, 혁신하면서 일을 해 보실 분은

다음 공채시에 반드시 apply 하시라.

(열정 없고, 그냥 분위기 좋은 직장을 찾아 적당히 근무하실분은

사절한다. 그런 사람은 눈빛만 봐도 안다)

글 솜씨가 미숙하고, 빠뜨린 부분도 있을 듯 한데,

이 글을 통해 알티베이스라는 회사를 더 정확하게 알리게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참고로 나는 아직까지는 행복하다.

알티베이스가 아직까지 나를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성진 sjkim@altiba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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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4 13:39

안녕하세요? 게임스타의 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블로그를 여기에 개설하네요.

추천해 주신 killk 님께 (사실은 학교 선배님)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맛있는 밥 사주세요..-_-;;

저는 현재 알티베이스 (http://www.altibase.com)의 개발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오라클과 맞짱을 뜨기 위해 밤낮으로 .....

언젠가 제대로 맞짱을 뜨기 위해 오늘도 노력합니다.

대한민국의 시스템 소프트웨어의 첨병이 되기를 빌며..


게임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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